농촌으로 숨어드는 불법체류 외국인들…
3일 오전 11시쯤 전남 영광군 옥당면 한 장례식장. 나흘 전 낙뢰(落雷)를 맞고 숨진 외국인근로자의 빈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이곳에는 직원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숨진 외국인이 어딨느냐”고 물었더니 “시신만 두고 갔다. 장례도 못치렀다. 아무도 오지도 않고 미치겠다”며 장례식장 직원은 화를 냈다.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30분쯤 영광군 염산면 한 논에서 모심기를 하다가 벼락을 맞고 숨진 태국인 찬숙 무아러이(여·51)씨.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와 심장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10시간을 채 못버티고 무아러이씨는 숨이 멎었다. 그날 밤 그의 시신은 장례식장에 안치됐다.
당일만해도 여동생과 함께 일한 동료, 친구 등 여럿이 장례식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고, 여동생조차 연락이 두절됐다. 장례식장 측은 “사망 당일, 시신은 여동생 나차텅넉(44)씨가 인계하기로 했는데 시신만 두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황당할 뿐”이라고 했다.
벼락을 맞고 숨진 언니를, 친구를, 동료를 두고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여동생 나차텅넉씨의 휴대폰은 착신이 정지돼 있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태국인 동료 4명도 수소문 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무아러이씨 사고를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이날 사고가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사망자 주변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불법체류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랬다. 무아러이씨도 불법체류자였다. 지난 2014년 7월 3개월짜리 방문비자(B-1)로 입국한 그는 같은 해 10월 출국하지 않고 머물렀다. 그와 함께 논·밭에서 일을 했던 태국인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경찰 관계자는 “여기(농촌)서 일하는 외국인근로자 대부분이 체류 기한을 뭉개고 남아있는 불법체류자들”이라고 했다.
장례식장 관계자는 “하루 15만원씩 하는 안치 비용이 부담스러워 안 오는 것 같다”면서 “시신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경찰은 주한 태국대사관에 무아러이씨의 ‘시신 처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놓고 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인구 5만6000명 영광郡에 중개업소만 8개
임금 적고, 일 고돼도 적발 위험 낮아 선호
농민들 “외국인들 없으면 농사 못짓는다”
무아러이씨가 사고를 당한 영광군 염산면으로 향했다. 영광읍을 벗어나자 논·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염산면 입구에 들어서니 군데군데 챙 넓은 모자에 수건을 두르고 밭일을 하는 농민들이 보였다. 논에서 만난 이모(71)씨는 “여기 농사는 외국인들이 다 짓잖아. 저 친구들 없으면 이제 아무것도 못해”라고 했다.
영광군은 인구 5만6000여명에 전통적인 농어업군(郡)이다. 농·어업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넘고, 고령화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영광군 행복소통계 관계자는 “군내 농촌 인구 중 70% 이상이 일하기에는 무리인 노인들”이라며 “외국인근로자가 일손을 대신하지 않으면 우리 농촌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들 불법체류자라서 문제지만...” 이라고 했다.
염산면사무소 부근 시가지에서는 ‘외국인 인력 모집’, ‘중국·말레이시아어 가능’, ‘단체 이동 가능’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나 광고전단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호남인력사무소장 김선녀(여·57)씨는 “영광에만 이런 업체가 8곳 정도 된다. 중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한족(漢族)들이 브로커 노릇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는 “읍내에서 사람들을 모아 봉고나 트럭에 태우고 논이나 밭으로 출퇴근을 시킨다”며 “멀게는 전북 고창이나 전남 장성에서 일하러 오는 외국인들도 있다“고 했다. 인력중개소를 운영하는 박모(56)씨는 “농가는 개인이 날품으로 고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들통날 위험이 적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선호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체류 비자가 있어 공장이나 건설현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임금도 적다. 정식 취업 비자가 있는 외국인들은 8만~10만원의 일당을 받는데, 불법체류자들은 5만~7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정식으로 취업해 있는 중국인 김모(57)씨는 “비자가 없으면 중개소에서 소개비 10%에 추가로 10%가량을 더 뗀다”고 했다. 숨진 무아러이씨는 일당 7만원짜리 근로자였다.
지난해 말 영광군에는 출입국청이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 한달여 동안 외국인근로자들이 싹 사라진 적도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 일용직 현장근로자가 일자리가 줄어드는데 화가나서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일을 하다가 다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영광군 내 한 마을 이장은 “우리나라 일꾼들은 예초기나 농기구를 쓰다가 다치면 병원에 드러누워 합의금도 요구하는데 불법체류자들은 일하다가 다쳐도 추방당할까봐 혼자 참는 경우가 많다”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부당한 서약서 같은 걸 못쓰게 늘 당부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