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병호 박사님 이 쓰신 책!! 내사랑 치앙마이 로 기억(??)
때문에 한국에 십여년전부터 더자세히 알려지며 ..가짜다 !!진짜다!! 진위여부 로
지금도 논쟁 의 중심에 선
라후족! 치앙라이 오부족마을 에 가면 30여명의 그분들을 만나볼수 있지요!!^^
치앙마이 에서 정확히 200 KM 떨어진 곳!! 치앙라이 주정부에서 5부족마을 로 꾸민곳 이지만~~!!!
한국가이드 들이 지금은 치앙마이 투어시 설명을 열심히 하고있지요!!
그곳에 가면 제가 4년반전에 "대한민국 고구려 후손 입니다!" 라고 쓴 볼펜+싸인펜 글씨가
그들 마을회관 기둥에 지금도 붙어 있지요!!!
제나름대로 4년반 연구하고 만나보고 공부하고 했는데
된장과 백김치를 담아먹고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가장이 겸상하고 부인과 아이들은 아래서 밥을먹구!
구사하는 언어 도 거꾸로 오는 태국말과 달리 우리말처럼 어휘순서 가 같습니다!
환영 간단공연 할때보면 시대상으로는 맞지 않지만 우리 강강 수월래 (임진왜란 때 유래) 처럼
서로 무리지어서 뱅뱅 돈답니다!!
그리고 그분들 얼굴을 보면 형제아저씨 두분 ! 족장님! 젊은처자! 아가엄마 는 우리랑 똑같이
생겼답니다!
신생아 낳은지 65일만에 우연히 아가 엉덩이 를 보았는데..~~ 몽고반점도 있어서 깜짝 놀랐지여!!
또한 언어도`어머니 ,아버지 ,식사, 등등 우리말 과 똑같은 부분이 지금도 남아 있구요!!
전쟁에패한 민족의 비통함 ! 피할수없던 상황속에........
그들의 먼조상들이 눈내리는 나라 에 살다가 전쟁에 패하고 당나라 군사에 의해서 "농우" 라는 지역 !!
지금의 티벳 ! 청해성 으로 3만 3천여 가정(대략 15만명 추정)
강제이주 당하게되었다고 운남성 의 라후족 지도자 가 증언
하였지요!!
언제라도 치앙라이 여행 오시게됨 꼭 한번 들려보세요!!!^^
더 정확히 알리기위해서 아래부터는~~!!! 글을 좀 인용해서 .....!!^^
여기서 부터 는 펌글 입니다! ※ 라후족(拉祜族)의 고구려 유민 후예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가운데 라후족은 그 언어, 민속, 형질유전자 등이 오늘날의 우리 민족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라후족의 기원을 고구려 유민과 연관시켜 연구를 하는 시도가 1990년대 이후 한국 국내에서 진행되었다. (1995년 한국 내 언어학, 민속학 및 형질인류학 등 관련 분야 학자 및 전문가 등이 ‘남방문화연구소’를 결성하여 라후족과 우리 민족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집중 조사, 연구함)
서기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유민들이 강력한 부흥운동 등 저항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자 당 조정은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수만 호(戶)의 고구려 유민을 오늘날의 회수(淮水) 유역과 사천성 · 청해성 · 감숙성 일대의 황무지 등으로 대거 이주시켰다(“唐移我人三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散徒其人於河南隴右諸州”,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十 寶臧王 下 및 《唐書》 東夷傳 高句麗). 이 가운데 사천성 · 청해성 · 감숙성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은 다른 지역의 유민들과는 달리 동화(同化)가 늦어지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도 현지의 군대로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凡關內 有團結兵 秦成岷湋河蘭六州 有‘高麗’羌兵”, 《舊唐書》卷43 職官2).
한편 오늘날 운남성 서부 지역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라후족은 그 기원을 중국 서북지방인 하황(河湟) 지역에서 남천하여 온 종족 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라후족의 구전전설 등에 의하면 “라후족의 원 거주지는 ‘마메무메’(고구려 수도 평양 부근의 ‘馬邑山’으로 추정하기도 함)였는데, 중국과 싸워 패해서 포로가 되어 ‘뻬핑’(당시의 ‘北平郡’, 오늘날의 北京 부근), ‘천혜’(당시의 ‘天內’, 오늘날의 내몽고 남부)를 거쳐 ‘농우’(隴右, 오늘날의 청해성 일대)로 끌려와서 살았고 현재 운남성, 미얀마 및 태국 북부 지역 등에 살고 있는 라후족은 모두 농우에서 이주 온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라후족의 옛 노래에 나오는 민족이동의 출발지인 ‘강서’(江西)는 오늘날의 청해성 서쪽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지역이 고구려 유민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하였던 ‘농우’(隴右)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所以古歌中的江西應是今靑海湖畔的江西”, 胡克禮, 《拉祜族歷史考》, pp.1-5, 김병호 외, 《남방문화》 Vol.1, 서울, 남방문화연구소, 1995년. pp.8-9에서 재인용)
일부 국내학자와 전문가들의 현지조사와 관련연구에 의하면, 언어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라후어와 한국어 간에는 문법의 유사성(“90% 이상”이 같다고 함) 등 연관성이 깊다고 한다(주어-동사-목적어 등의 어법상 순서가 같고 예를 들어, 한국어의 “나는 서울로 가요”라는 문장을 라후어로 말하면 “날래 서울로 까이요.”라는 식으로 오늘날 함경도 방언과 유사하다고 한다). 또한 라후족의 풍속에는 한국인의 색동옷, 씨름, 호랑이 숭배(고구려의 濊族이 호랑이를 숭배하였으며, 라후족도 사당 안에 호랑이 그림을 붙여놓고 숭배함), 고대의 ‘소도’(蘇塗) 및 제천의식 등과 유사한 것이 많다고 한다.
운남성의 라후족의 전통 씨름은 한(韓)민족의 씨름과 너무나 흡사하다. 나무껍질로 만든 샅바를 허리에 맨 뒤 상대 선수가 선채로 허리의 끈을 양손으로 잡고 있으면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유지가 나와서 양 선수의 몸에 소금을 뿌린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든 상대 선수를 넘어뜨리기만 하면 이기게 된다. 씨름 경기가 시작되면 구경꾼은 라후족말로 “부뚜오라 부뚜오”라고 응원을 하는데 “힘을 내라”는 뜻이며, 한국어의 “붙어라 붙어”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울러 문헌과 고구려 벽화 등에 고구려인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와공후’와 ‘각’(角) 등의 악기를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체질인류학적 조사연구 결과 라후족과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특이한 공통항원(HLA 검사)이 함께 존재하고 라후족의 두상 형태 등 체형도 한국인과 만주족 등에게만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에 착안하여 한국의 일부 학자와 전문가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청해성과 감숙성 일대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그 뒤 운남성 등으로 남하하여 오늘날 라후족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는 가정을 세우고 관련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잠정적인 추론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후 중국 내륙 각지에 강제이주 당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은 대부분 한족화(漢族化)되었지만, 강족(羌族)과 이웃하여 살았던 농우(隴右)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은 서기 10-13세기경 중국의 서남쪽 운남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의 라후족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다.(김병호 외, 《남방문화》 Vol.1, 서울, 남방문화연구소, 1995년. 참조)
- 1 라후족은 원래 중국에 거주하였으나 중국 중원왕조의 박해와 억압을 피하여 미얀마, 라오스 및 태국의 북부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도 하였다. 특히 1880년 영국이 당시 버마 북부 지역을 장악하자 중국 청 왕조는 남부 변경지방 확보를 위해 라후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을 강압적으로 장악하려 하였으며 이에 라후족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장비와 무기 등의 열세로 패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 일대로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오늘날 소위 ‘황금의 삼각지대’로 부르는 지역에 약 30만 명 이상의 라후족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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