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전사를 기록한 유재흥장군을 아시나요?
한국전쟁 발발하여 7사단장으로 덕정.의정부.창동 전투에 참가
지휘하던 7사단을 궤멸시키며 대패하여 수도 서울을 북에 넘겨 주고
2군단장이된 후에 중공군의 개입후 연합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인 청천강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자신 휘하의 2군단을 궤멸시켜 반격작전 자체를 무산시키며
미군2사단의 괘멸과 흥남 철수의 원인제공을 하며 2군단이 해체가 되고 압록강까지 진군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고 연합군은 후퇴하게 된다.
그후 연합군의 반격을 노리며 형성된 전선인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선에서 3군단장으로
625사변의 최대 패배를 기록하는 전과를 올리며 패장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대대병력의
중공군 병력의 기습에 놀란 유재흥의 군지휘부는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고
부대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돌입한다. 명령지휘 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모든 부대원들이 방대산
퇴로를 향해 줄행랑을 쳤다. 통제 불능 상황이 되자 일부 장교들은
차량과 중장비를 파기했으며
병사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마저 버리고 달아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며 군단 병력의70%가 전사 실종 포로가 되는 세계전사에
기록을 남기며
7사단장으로 서울 방어의 패배 청천강전투에서 대패로
2군단 괴멸 현리 전투에서
3군단 해체와 대한민국 군의 전시작전권을 빼앗긴 그는 419혁명에 정군 대상이
되어 군에서 쫓겨나나 타카키의 등장으로 등용되어 국방담당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방장관이 된다.
그후 노무현정권에서 유재흥 자신이 빼앗겼던 전시작전권을 되찾으려 했을 때
가장 극열하게 반대했던 똥 별이었다.
현리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던 조창호 소위가 북한을 탈출하여
돌아온 후에 유재흥에게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돌아온 자신의 부하의 면담도 거부하였다.
쪽국의 대좌 출신인 그의 애비가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왜놈으로 사육되어
쪽국 육사 출신으로 전장터에서 통역을 대동하고 지휘하였으며
한국말도 못해 통역을 통해 왜놈말로 떠드는 한국군 지휘부가
빨갱이들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혹자는 말한다.
북한 빨갱이들의 625 최고 지휘관은 유재흥이라고…
이런 유재흥이는 뒈져서도 국립묘지에 자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