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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노병(老兵)의 오래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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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노병(老兵)의 일기

 

-6.25 전쟁에 참가한 태국 푸 마트롱 하사의 61년 전 일기-

 

인터뷰:Harry, 이유현.  한태 교류센터(KTCC)  대표이사

 

#장면1

1950 9월 어느 날 이었다.

3년 간의 의무 병과 교육과정을 마친 뒤 2년 째 부사관으로 근무 중인 태국인 푸 마트롱 하사는

한국전쟁에 파견된다는 정보를 처음 접했다.

상급자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몰려왔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굳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빠져도 좋다는 단서가 있었다.

 

하지만 스물넷 혈기왕성한 푸 마트롱 태국 육군하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군인이 전쟁을 피해갈 순 없다!’

그래도 부모님에게는 파병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동료들을 보니 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한국 행 배는 군함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온 물류 수송선이었다.  물건을 직접 하역하고 동료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태국을 출발한 날짜는 1950 10 22.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꼬박 17일이 걸렸다.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갔는데 배 안에서 먼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도 거친 항해였다.  날짜가 지나 한국에 가까워 질수록 두려움이 커져갔다.

 

#장면2

1950 11 7일 부산항.

태국은 6.25 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총 3천 여명의 군인을 파견했는데

푸 마트롱 하사는 한국에 파견된 첫 태국 부대 군인 중의 한 명이었다.

 

푸 마트롱 하사는 한국에 첫 발을 대딛던 61년 전 그 순간의 느낌이 어제일 같다.

평균보다 큰 키와 완력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군인이었지만  전장터가 가까워 질수록 그 엮시 전쟁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리라.

 

연중 30도가 넘는 태국의 날씨에 비해 늦가을 한국은 쌀쌀했다.

부산항에 내리면서 산이 참 많다는 기억이 가장 먼저 들었다. 둘러봐도 구릉 하나 없는 방콕과는 딴 판이었다. 아침이나 저녁도 아니었으며 사방이 밝은 기억으로 미뤄 대낮에 한국 땅을 밟았던 것으로 추측됐다.

작은 아이들이 쪼르르 몰려와 한국을 도와주러 온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정체 모를 꽃을 달아주었다.

 

부산에 내린 뒤 곧바로 기차를 타고 대구로 이동했다.

이동 하기 전후에 무기를 다루는 법, 북한군의 신무기 화력 등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

 

푸 마트롱 하사가 한국 땅에 상륙하기 이전 전쟁은 한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전쟁초기의 일방적 후퇴에서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수복했으며,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태국군이 한국에 파병됐을 때 한국사람들은 폐허 속에서도 통일의 꿈을 부풀리며 `북으로 북으로를 외치고 있었다.

 

#장면3

이송되어온 부상병 치료가 그의 역할이었다.

수도 없이 부상병을 받았고, 풀잎에 잠깐 맺혔다 떨어져가는 이슬 같은 생명들을 하루에도 수십명 씩 지켜봐야 했다.새까만 숯처럼 타 병원으로 후송되어온 군인들이 고통으로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 20대 중반의 그의 눈에는 쉼없이 눈물이 번졌다.  

 

의무병 한 명에게 할당된 부상병은 40명 씩이었다.낮과 밤이 따로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북진하는 부대를 따라 푸 마트롱하사는 평양까지 진격했다. 평양엔 많은 눈이 내렸다.

포격 맞아 집들은 모두 납작하게 무너져 있었고,  배고파 길 잃어 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금찍했던 평양의 추위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뼛속까지 전해져 오는 듯 하다.

 

북진과 승리의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무너지고 치열해졌다.

그가 파병된 지 3개월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1.4후퇴가 시작됐으며, 설원에 온통 흰옷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수도 없이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대포와 탄피가 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태국에서 같은 배를 타고 파병됐던 가장 친한 친구가 이때 숨졌다.

 

부상병들이 외쳐댔던 `이라는 한국어 한 글자는 아직도 귀에 환영처럼 들려오는 듯 하다. `막걸리’, `과 같은 한국어는 아마 **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국의 첫 파병군인으로 평양 땅을 밟았다 다시 후퇴해 1년만인 1951 10 16일 그는 다시 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전쟁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 36년 동안 직업군인을 하다 60세에 정년 퇴직했다.  2차 대전도 겪었지만 한국전쟁은 그의 머리 속에 구순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남아 있다.

 

#장면4

16년 전인 1995.

한국전쟁 4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전용사는 항공비를 보조해 준다고 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포연과 신음소리로 얼룩졌던 그 나라가 신천지로 바뀌어 있었다.

고층빌딩이 곳곳에 들어섰고, 거리는 깨끗하고 활력에 넘쳤다.

[, 이곳이 그 수많은 젊은 꽃들이 떨어졌던 곳이었던가?]

 

판문점에서 남북의 분단과 전쟁의 기억이 겨우 현실화 됐는데 여전히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한국이 안타까웠다. 한국은 잿더미에서 이렇게도 빨리 일어섰는데, 전쟁 지원국이었던 태국은 오히려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부족한 것이 없는 평화롭고, 편한 환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면5

61년 전 한국에서 발행된 전쟁에 참가했던 85세의 푸 마트롱 옹은 아들 셋을 뒀다.

아들 둘은 아버지를 따라 직업군인이고, 아들 하나는 사업가다.

손자가 셋.  요즘 손자 보는 게 낙이다.

 

img_3879

 

전쟁 베테랑으로 사선을 넘었고,  수많은 영혼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때문인지 참전용사 중에선 오래 사는 축복을 받았다.

전쟁에 참가했던 전우들은 하루가 모르게 세상을 떠나고 있다. 당뇨, 고혈압, 관절염, 백내장 등 `종합병원을 방불케 하지만 그것은 세월이 주는 또 다른 훈장이 아닌가.

 

61년 전 그의 인생 가장 화려했던 시절에 목숨 받쳤던 그곳, 코리아.

꿈에서인들 어찌 잊을런가. 지금은 더 발전했다고 들었다. 고맙다며 찾아주는 한국인을 보니 까닭 없이 눈물이 난다.

한이 많은 그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절로 나오지만  이젠 슬프지 않다.

 

*이 글은 6.25전쟁 태국인 참전용사 푸 마트롱 옹의 구술로 재연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시간이 흘러 구체적인 전투상황과 날짜 등은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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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교류센터(KTCC)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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