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4일 뒤 이들은 묵고 있던 호텔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독일핸드볼협회는 스리랑카 선수들이 혹시 조깅을 하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닐지 경찰에 수색을 요청했다. 그러나 웬걸.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유럽 불법체류를 겨냥한 가짜 선수들이었다. 스리랑카에서는 핸드볼 국가대표팀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독일 핸드볼 관계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리랑카 '대표선수'들이 비록 실력은 기대만큼 못했지만 몇 경기 동안 국가대표다운 엄청난 팀워크를 보여줬기 때문. 결국 이들은 정말 뛰어난 '팀워크'를 발휘하며 일사불란하게 유럽 각지로 숨어들어갔다." ( < 일요신문 > 2004년 12월 25일자 '해외스포츠 황당사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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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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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도망가려 했던 애초의 계획은 틀어지고, 그들은 핸드볼 경기에 투입된다. 매번 참패를 당하면서 그들은 더 이상 '불법취업희망자'가 아닌 '국가대표 핸드볼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다.
단 한 득점도 내지 못하던 그들이 마침내 처음으로 1득점을 하는 순간, 그들은 마침내 '해냈다'는 감격에 하나가 됨을 느낀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스리랑카를 떠난 그들은 생면부지의 타인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이다.
경제적 위기를 겪은 남성들이 엉뚱한 발상으로 극복한다는 스토리 포맷은 영국 영화 < 폴 몬티 > 와 흡사하지만, < 마찬 > 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경제적 약자라는 위치뿐 아니라 약소국 국민으로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멸시에 대한 경종이 그것이다.
개오줌이 행운을 불러온다는 속설에, 발에 묻은 개오줌을 씻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절박하다. 오로지 외국 취업만이 희망이다. 매번 독일 비자 인터뷰에서 퇴짜를 맞으면서도 그들은 독일 취업을 꿈꾼다. 비자 발급에 거절당한 뒤 마노즈는 심사관에게 묻는다.
"왜 우리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나요?"
천신만고 끝의 독일 출국이 확정되고 난 뒤, 마노즈는 자신이 일하는 외국인 호텔식당에 자신의 가족들을 초청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고, 파란눈의 서양인들이 우아한 몸짓으로 식사를 하는 그곳에 돌연 나타난 마노즈의 식구들은 외국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현란할 정도로 울긋불긋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촌스럽게 쭈삣거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며 마노즈는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마노즈는 이 일이 있은 후 그렇게나 학수고대했던 독일행을 포기한다. 이유를 묻는 스탠리에게 마노즈는 "독일에 가게 되면 식구들을 더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결국, 경제적 가치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더 중요시한 것이다. 부유한 독일보다, 가난한 스리랑카를 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마노즈는 약소국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마노즈가 가지 않은 설정은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 마찬 > 이 < 폴 몬티 > 와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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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과 입국을 해본 사람이라면 느끼는 것이지만, 출국은 대체로 느슨한 편이라면 다른 나라의 입국심사는 깐깐하다. 그것이 만약에 선진국의 경우라면 더 엄격하다. 그 순간만큼은 개인적인 '나'가 아닌, 대한민국 한 부분으로서 심사를 받는 기분이다.
기분 참 묘하다. 그 미묘하고 불편한 심리를 이 영화에서는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입국심사대 앞의 거만하고 오만한 독일 심사관의 모습과 입술이 바짝 마른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스리랑카 및 다국적 유색인종의 대비된 모습은 그 권력의 상하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 마찬 > 은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작품이지만 딱딱하거나 피곤하지 않다. 그 바탕에는 배경인 스리랑카의 낙천적이고 느긋한 정서가 은은히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다해도 스크린 속 스리랑카의 모습은 일그러있지 않다. 생활 환경은,(적어도 우리 눈에는) 더럽고 불결해 보이지만 항상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기적을 믿는 그들의 얼굴 표정만큼은 참 평화롭다.
집세를 안 냈다는 이유만으로 세입자가 지붕을 하나둘 뜯어가는 데도 "별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과연 '돈'이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 마찬 > 은 행복의 척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고단한 현실속 '친구(마찬)'를 찾는 이야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특별전 : 스리랑카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양인 감독과 서양자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스리랑카 감독과 자본으로 스리랑카의 문제와 현실을 직시한 본격 스리랑카 영화라기보다는 입맛에 맛있게 만든 '퓨전' 스리랑카 영화같은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격 스리랑카 영화가 너무 어렵다면 이러한 영화로부터 스리랑카의 현실에 한발씩 다가가는 것도 의미있겠다.
< 마찬 > 은 스리랑카어로 '친구'란 의미다.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저녁 식사인 '만찬'과도 발음이 비슷해 폐막작으로도 어감상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