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태국 국가대표 팀 최고의 얼짱 "Jib". 그는 어제 일요일 아침 비행기로 라오스에 갔답니다. *** 생년월일과 고향, 직업을 말씀해 주세요. 1971년 4월 30일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났습니다. 2002년 2월 1일부터 현재까지 태권도 태국 국가대표 팀(17세 이하 청소년 팀 포함) 감독직을 맡고 있습니다. *** 태권도를 하게 된 동기는? 저는 주위의 다른 선수들보다 늦게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는데 그 때 3년 선배가 임춘애 선수입니다. 임춘애 선수하면 가장 먼저 가난과 라면으로 기억되지만 당시 우리학교 육상부에서 제일 부자였습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체육을 담당하고 계셨는데 우연찮게 태권도 체육관 관원 모집 찌라시를 보게 되었고, 마침 친한 친구가 도장을 다닌다 해서 몇 번 따라다녔습니다. 친구가 하니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한테는 도저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 사실을 아신 사범님이 한 달치 회비를 내주신 덕분에 3개월 동안 엄마 몰래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되었어요. 물론, 나머지 두 달 회비는 제가 용돈을 모아서 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아셨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닌다고 많이 혼났습니다. 당시 어머니의 꿈은 아들을 대학교수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부님이 어머니를 만나서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태권도를 하게 해달라고 하셨고, 결국 어머니와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만 하기로 약속하고 체육관 회비는 어머니께서 내주셨어요. 그렇게 3개월 지나고 대회를 나가는데 선수 한 명이 부족한 것입니다. 품띠가 되어야 했지만 한 명이 부족해서 제가 가라(!!)로 전국 대회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른 선수는 다 떨어졌는데 저만 3등을 해서 중학교 특기생 자격을 얻었어요.ㅋㅋㅋㅋㅋㅋㅋ 등록금을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태권도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제가 공부를 못한 것은 아니고 좀 했습니다. *** 선수 시절의 최 감독은 어땠나요?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 우승을 했을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은 국가 대표가 꿈이었지만 저는 외국에 진출하는 지도자의 꿈을 어린나이부터 키웠습니다. 친구들은 야간 운동을 할 때 저는 운동을 빠지고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영어 단어장을 30권정도 쓸 정도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영어 공부하느라 운동에 빠져도 선생님이 봐줄 정도였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빨리 돈을 벌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 대학 진학 사연이 많았다지요? 대한민국에서 풍생 고등학교하면 태권도일 정도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나락님은 풍생하면 축구라고 하셨지만 태권도가 더 유명한 학교입니다. 공부와 운동 사이에서 다시한번 진로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태권도하는 많은 학생들은 경희대에서 운동하기를 원합니다. 경희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와서 친구 한 명과 가기로 확정이 되었는데 당시 후원금 형식으로 300만원을 기부하는 것이 신입생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고생하시는데 도저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경희대를 포기하고 경원대로 4학년 전 학기 장학생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대회 나가서 입상하면 장학금을 더 준다는 옵션사항까지 추가되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 모두 체육 특기생으로 가서 수업료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태권도 태국 국가대표 팀의 최 영석 감독. *** 외국에서 지도자를 하게 된 이유는? 결국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돈을 빨리 많이 벌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외국에 나가서 지도자 생활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선배 한 분이 스페인 감독으로 계셨는데 우리 학교를 방문 하셨어요. 그 분에게 외국에서 감독을 하려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일단 영어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면 되겠다 싶어서 영어 단어장을 30권정도 썼던 것입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마침 바레인에서 한국인 감독을 찾고 있었고 1년 8개월을 계약하고 갔습니다. *** 첫 번째 바레인 팀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너무 외롭고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운동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정말 외로웠습니다. 숙소 근처에 특급 호텔이 하나있었는데 저녁마다 그 호텔로 마실을 가곤 했습니다. 로비에 생음악을 하는 바가 있었는데 그 생음악이 너무 듣기 좋았고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생각이 나면 랏차다의 에메랄드 호텔 로비 바에 가서 맥주 한 잔 하곤 합니다. *** 세계 랭킹 125위 태국 팀을 책임진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나요? 대학 동기 중에 호주 대표 팀 감독으로 간 친구가 있었습니다. *** 외국에서 외국인 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 과연 어떤 느낌일까요? 혹시, 태국의 유일한 외국인 코치인가요? 바레인과 태국 모두 오기 전에는 외국인이라서 약간의 차별과 견제를 예상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어요. 가장 힘든 것은 선수들과의 소통, 커뮤니케이션이었습니다. 몸으로 먼저 시범을 보여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기술을 전부 알려주고 싶은데 제대로 알려주지 못할 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짜증이 너무 났어요. 지금은 태국어가 되니깐 그런 스트레스는 없습니다만. 태국의 경기 단체 중 유일한 외국인 감독은 아니고요. 양궁도 한국인 감독이 있습니다. 처음 태국에 왔을 때 훈련장을 유도 대표 팀과 같이 쓰고 있었습니다. 나락님도 아시겠지만 유도 선수들 훈련 할 때 바닦에 집어 던지고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협회에 이야기해서 우리 팀만 따로 쓸 수 있는 훈련장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어렵게 지금 운동하고 있는 태권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경기 단체에서 불만이 엄청 많았지만 올림픽에서 메달 따니깐 그런 소리 못합니다. *** 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오전 6시부터 2시간 동안 대표 팀 선수들과 같이 땀을 흘립니다. 오전 10부터 오후 4시까지 카셋삿 대학에서 스포츠 심리학 박사과정 강의를 듣는데 일주일에 3일 나갑니다. 다시 오후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대표 팀 훈련이 있습니다. **** 대표 팀 선수들이 전부 학생인데 수업은 어쩌지요? 17세 이하 청소년 팀과 우리나라의 상비군 같은 팀, 그리고 A팀(성인 국가대표)을 전부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오전 8시에 훈련이 끝나면 모두 공부하러 학교에 갑니다. 알아서 등교하고 수업마치면 각자 5시까지 훈련장으로 다시 모입니다. 한국처럼 운동 때문에 수업에 빠지고 그러는 것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태권도를 하지 못하게 될 경우 뭔가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 길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럴려면 학과 공부는 꼭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한국처럼 운동선수라서 수업 빠지고 그러는 것 없습니다.
물론, 발차기 같은 기술적인 요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술적인 것은 태권도 선수라면 누구나 다 할 줄 알거든요. 태권도는 禮로 시작해서 禮로 끝나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운동을 잘해서 금메달을 따면 뭐합니까? 사람이 안됐으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태권도 선수층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틀리겠지요. 제가 오기 전에는 태권도 협회에서 선수 선발을 했습니다. 선수층이 얇다보니 무에타이 선수가 대회에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 백전백패입니다. 제가 오고 나서 감독인 제가 직접 선수를 선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릴 때부터 시작을 해서 대회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목표 의식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사회가 변하면서 전처럼 이것 안하면 죽는다는 절실함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태국은 목표 의식 하나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동기부여가 참 좋아요.
*** 혹시, 대한민국에서 국가대표 팀 감독으로 부르면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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